제 3과 성령의 열매인 희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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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과 성령의 열매인 희락
1월 16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38분)
도입)
희락(喜樂)이란 “기쁨과 즐거움, 희열”을 말한다. 성령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내게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찬송으로 우러나는 것이다. 희락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그리스도의 용서의 은총을 체험하고, 성령님을 만나 영적인 체험을 가진 데서 나오는 영적인 기쁨이다. 따라서 참된 희락은 신앙에 기초를 둔 것이고, 하나님께 참 기반을 둔 사람이 소유한 기쁨이다(시 30:11; 롬 14:17; 5:13; 빌 1:4, 25).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이곳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것은 세상적인 것이나 값싼 승리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다. 더욱이 서로 대항하고 있거나 경쟁하는 이를 이긴 데서 오는 기쁨은 더욱 아니다. 따라서 희락은 “하나님께 기반을 둔 사람의 기쁨”이다. 희락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심오한 내면적 기쁨이다(요 15:11). 그것은 만사를 통괄하시는 하나님의 절대권에 근거하기 때문에 상황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롬 8:28). 희락은 성품의 작용 혹은 미덕이라기보다는 마음 속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거하기 때문에 삶 속에 흘러 들어온 감정이다.
기억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
연구범위: 시 139편, 눅 15:4~24, 요 15:10~11, 히 11:16.
안식일 오후
기쁨(희락)과 행복은 꼭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행복은 상황이 좋을 때 그 결과로 오지만, 기쁨은 상황과 관계없이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이르러 온다.
시편 4:7에는 기쁨과 행복이 대조를 이루어 나타난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더 큰 기쁨”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신뢰할 때 이르러 오지만 행복은 풍성한 추수와 같은 유쾌한 상황의 결과로 이르러 온다. 내적인 기쁨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한 계속되지만 행복은 곡식의 수확량과 같이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내적인 기쁨은 실망을 이겨내지만 행복은 실망감에 압도되어 버린다. 내적인 기쁨은 영속적이지만 행복은 일시적이다.
기쁨은 고통이나 쾌락보다 더 깊이까지 파고드는 삶의 즐거움이다. 이러한 기쁨은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임하신다는 자각에서 오며 상황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에 초점을 맞추기로 자신을 허락할 때 맛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활동하신다는 확신에서 생겨난다.
일요일(1월 10일)
기뻐하라는 명령(빌 4:4)
도입)
기뻐하라는 명령은 기도하라는 명령보다 우선한다. "항상 기뻐하라. 그리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 ‘스테판 차르녹’의 말이다. 우리로서는 항상 기뻐해야 한다. 기쁨은 영적 조율이다. 기뻐하라는 명령은 기도하라는 명령보다 우선한다. 항상 기뻐하라 그리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 기쁨은 아름다운 선율을 이루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기도도 투박한 목소리로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구원의 은혜를 소유한 사람은 세상을 보는 안목이 달라진다. 죽음을 뛰어넘어 영원히 사는 자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기 때문에 항상 기뻐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많은 신자들이 자신에게 일어난 나쁜 일로 인해 쓴 감정을 느끼고 화를 낸다. 그 결과로 그들은 영적 생애에 기복(起伏)을 경험한다. 그들에게는 기뻐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성경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빌 4:4)고 명령하는 것이다.
우리가 처한 환경이나 주변 사람들로 인해서는 항상 기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부정적인 요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 안에서는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그분은 선하시고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적인 안정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헌신과 직접 관계가 있다. 그분을 아는 것은 환경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안정감을 제공해 준다. 그래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은 시의 형식과 운율을 가진 노래의 형태로 기록된 시편들을 암송하고 노래함으로써 하나님에 관한 더 심오한 지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분을 알게 되면 다른 모든 것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보인다.
1. 시편 139편, 로마서 8:28, 베드로전서 1:8~9에는 우리가 기뻐해야 할 어떤 이유가 제시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 약속에서 어떻게 기쁨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답:
기뻐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양자로 삼으시며, 예수 안에서 기업을 약속하신 사실(엡 1:1~11)은 어떤가? 예수께서 오실 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 하며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하늘 처소(요 14:2)를 보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그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이다(빌 4:19). 뿐만 아니라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분을 섬기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그 특권 속에는 잃어버린 바 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동료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분께 더 많은 사랑과 봉사를 나타내도록 격려하는 것도 포함된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히 4:15~16)도 기쁨의 요소이다. 끝으로 죽음이 우리를 영원히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도 기뻐할 이유이다.(고전 15:54)
교훈: 기쁨은 환경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언제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우리가 진정 기뻐해야 할 많은 이유를 마음속에 간직하자.
부가적용)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라이프 스타일이다. 바울은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힘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의 역사이다. 여기엔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가 기쁨과 기도, 감사라는 것이다. 이밖에도 바울은 약한 자를 돕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등 그리스도인이기에 감내해야 할 숱한 삶의 원칙들을 제시하고 있다.
월요일(1월 11일)
그리스도의 기쁨(히 12:2~3)
도입)
기도의 선구자였던 조지 뮬러는 자신의 사역에 있어서 기쁨이 얼마나 큰 역할을 차지하는 가를 깨닫게 되었다. 조지 뮬러는 간혹 자신의 영혼이 지친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전에는 그는 봉사와 헌신을 하였으나 그의 마음에는 고통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 안에서 만족과 기쁨을 누리게 되었을 그의 영혼은 원기를 회복하게 되었다. 조지 뮬러는 “영혼이 아침 일찍 원기를 회복하고 행복하게 될 때”와 “영적 준비가 없이 그 날의 봉사와 시련과 시험이 덮칠 때”가 전혀 다르다고 증언한다. 뮬러는 그의 사역 속에서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느8:10)이 우리의 진정한 힘과 능력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뮬러는 고백한다. “나는 그 진리의 유익을 잃지 않았으며 40년이 넘게 지난 자금도 잃지 않았다.” 진정한 기쁨은 우리의 삶에서 죄와 유혹을 이기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기독교가 죄에 대항하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 기독교는 죄에 쾌락에 대해서 금욕주의로 대항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율법주의적 명령으로 죄와 싸우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에는 죄를 이기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이다. 여기에 죄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더 좋은 만족을 주심으로써 죄를 이기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넉넉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쁨으로 가득 찬 생애를 사셨던 그리스도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그분이 가지신 기쁨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분은 어떤 원칙에 따라 생애하셨는가?
1. 예수께서 말씀하신 유명한 다음의 세 가지 비유에는 기쁨이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이 세 이야기에 나오는 공통적인 요소는 무엇입니까?
잃은 양의 비유(눅 15:4~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잃은 은전의 비유(눅 15:8~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탕자의 비유(눅 15:11~2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세 비유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는다. 기쁘게 잔치를 벌인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잃은 자를 찾아 나서는 것은 하나님의 순수한 기쁨이다. 예수께서는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기쁨으로 충만하셨는데, 이는 그분이 많은 사람을 구원하실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2. 히브리서 12:2~3에 기록된 말씀의 깊은 뜻을 음미해 보십시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니라(히 12:2). 이 말씀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 보십시오. 그분 앞에 있는 즐거움이란 무엇이었습니까?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께 왜 그토록 중요한 일입니까?
답:
교훈: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사시는 동안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당하셨으나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일을 통해 지극히 순결한 기쁨을 누리셨다.
부가적용)
<스필버그>가 제작한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장면에는 참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장면이 있다. 독일이 항복하자 유대인들은 자유인이 되고, 쉰들러는 도망자의 신세가 된다. 이별의 순간, 그를 통해 구원을 받은 1,100명의 유대인들은 금니를 빼서 만든 금반지를 그에게 선물하였다. 그 반지에는 탈무드에 나오는 한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누구든지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면 그는 곧 온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 쉰들러는 이 글귀를 보고 통곡한다. 그리고 외친다. "더 구할 수도 있었을 거야, 좀 더 구해 낼 수 있었어. 왜 이 차를 안 팔았지. 최소한 열 명은 구했을텐데. 왜 이 금뱃지를 팔지 못했지. 두 명은 구했을 거야. 최소한 한명은 더 구할 수 있었어. 그런데 구하지 못했어……." 라고 고백하는 말이다. 예수님은 3년반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그가 하실 수 있는 최선을 다하셔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로 보내셨고 그 일로 말미암아 얻은 기쁨을 간직하셨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과 목자의 마음을 일치시키고 있다. 잃은 양을 찾아다니는 목자의 심정이 바로 하나님의 심정이라는 것이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서 어깨에 메고 돌아올 때에 뛸 듯이 기뻐한 것처럼 세상에서 헤매던 한 영혼이 전도자에 의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너무너무 기뻐하신다. 이 일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해야 할 가장 고귀하고 순결한 기쁨이다.
화요일(1월 12일)
순종의 기쁨(요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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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8,9) 한 흑인 설교자가 '순종의 의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만약 주님께서 저더러 돌담을 뛰어 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그대로 순종할 것입니다. 이는 뛰는 것은 제가 할 일이고 넘게 해주시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며 그의 뜻을 따르며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통치에 맡기는 것이다. 그 순종의 대가는 기쁨과 평안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죄 된 옛 성품이 남아 있어 너무나 자주 순종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 그 순종이 우리로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기 때문이다.
1. 요한복음 15:10~11을 읽으십시오. 예수께서는 기쁨을 무엇과 연결시키셨습니까? 실제적인 의미에서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합니까? 즉 우리를 이와 같은 기쁨으로 이끌어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답: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는 것은 이미 죄책감에 눌린 양심을 더 예민하게 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를 죄책감에서 자유롭게 해 준다. 하늘에 전쟁을 가져오고 이 지구상에 죄와 죽음을 가져온 것은 불순종이었음을 기억하라.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과 시련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결과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기쁨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다.
2. 시편 19:8, 예레미야 15:16, 마태복음 7:21~27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들은 순종과 기쁨을 어떻게 연결시키고 있습니까?
답:
물론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지만, 행함을 구원 얻음의 의미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행함은 우리의 구원의 실체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헌신을 온 우주 앞에 드러내 준다. 어떤 사람이 단지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한다고 하여 그를 율법주의자로 부른다면 우리는 이사야가 경고한 그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사 5:20)
교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죄책감과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우리 인간은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참된 기쁨을 회복하는 길이다.
부가적용)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철저한 순종이다. 철저한 순종에는 내 생각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무조건 말씀대로 하는 것이 철저한 순종이다. 그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기독교 희락주의자 존 파이퍼. 그가 말하는 기쁨에는 순종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는다. 온전한 기쁨이라는 방법은 하나님과의 교통에 장애가 되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나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면 모든 소유의 끝을 놓아야 한다. 자신의 소유를 너무나 사랑하는 부자 청년이 있었다. 예수님은 그의 우상숭배를 꿰뚫어보시면서 명령하셨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 진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 예수님을 따르는데 장애가 되는게 있다면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수요일(1월 13일)
힘든 때에 누리는 기쁨(요 16:33)
도입)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기쁨의 근원은 무엇인가? 로마 황제 네로는 기독교를 박해하기로 악명이 높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원형 경기장에 몰아넣고 사자 밥이 되게 하거나 갖가지 방법으로 학살하였다. 그런데 성도들은 죽어가면서도 기쁜 표정을 짓는가 하면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들의 표정에 어두운 그림자나 슬픔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본 황제의 경호장교 한 사람이 감동을 받았다. 그리스도인들이 살이 찢겨 죽으면서도 그렇게 기뻐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 궁금하던 장교는 그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생명이 있기 때문임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고, 결국은 순교의 대열에 동참하였다. 성경은 말씀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전3:12)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 16- 18)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기쁨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말미암은 기쁨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재물이나 권력보다도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만일 누군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분명히 그가 나쁜 짓을 저질렀거나 믿음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을 잔인하고 냉혹한 분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에서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모두 시련을 겪을 것이라고 하셨다. 사자굴 속의 다니엘 이야기를 누구나 좋아하지만 사실은 사자굴에 던져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맹수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겼다. 풀무불 속에서 살아남은 세 명의 히브리 청년의 이야기도 있지만 화형주에 달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화형을 당했다.
1. 갈라디아서 6:9, 야고보서 1:2~4, 베드로전서 1:6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고통의 시기에 도움이 되는 어떤 희망과 약속을 발견하게 됩니까?
답: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기쁨을 갖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중심적이라는데 그 원인이 있음을 생각해 보라. 물론 현실적으로 문제에 봉착한다 할지라도 오직 그 문제에만 집착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생각이 사로잡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우리는 기쁨의 근거를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 찾아야 한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다(참조 마 10:30)고 하지 않으셨는가? 이 말씀 속에 담겨 있는 약속을 생각해 보라. 만약 우리가 예수님 안에 안전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시련의 때에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 봉사할 것이며, 그러한 단순한 의식적 행동으로 인해 자기 연민은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 42:10)
교훈: 시련의 때에 기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 자신이 겪고 있는 시련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그리스도께 집중할 때 기쁨을 되찾게 된다.
부가적용)
그리스도인은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즐겁게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더 이상 절망 속에서 슬픔에 젖어 있거나 고통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지만 부활의 종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부활로 새롭게 십자가의 의미를 찾는 종교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좋은 환경이 오면 기뻐하고 역경이 오면 좌절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죄와 죽음과 세상의 질곡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기쁨, 그리고 승리와 감격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더 이상 찡그리지 말라. 어깨를 펴고 위를 바라보라. 그리스도인은 손해를 보면서도 기뻐하고 당하면서도 즐거워하는 사람들이다. 세상과 사탄의 공격에 말려들지 않고, 그 폭풍과 역경 속에서도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며 감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렇듯 역경 속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 때문이다. 예수님은 고난과 핍박과 역경보다 더 위에 계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죽음보다 강하고 어떤 환경보다도 위대하시다. 그분에게는 자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있다. 예수님 때문에 핍박받았다면 부끄러워하거나 절망하지 말라. 더 적극적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머지않아 곧 승리의 면류관이 당신에게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목요일(1월 14일)
지속적인 기쁨(히 11:24~25)
도입)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은 일시적 기쁨이 아니라 지속적 기쁨이다. 우리의 기쁨이 계속 유지되게 하기 위해서, 기쁨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 즉 매일 주님과 가까이 있는 것이다(요15:10-11).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은 정기적으로 우물에 가서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양분을 공급해 주는 포도나무에 항상 붙어 있는 가지의 모습이다. 지속적인 기쁨을 얻으려면 내가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태도가 필요하다(요15:5). 하나님을 깊이 의지할수록 깊이 있는 기쁨을 얻을 수 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 11:24~25)
1. 위의 구절에서 그리스도인 삶의 어떤 원칙들을 발견하게 됩니까?(참조 눅 9:23, 행 14:22. 빌 1:29). 우리는 이 구절들을 기쁨에 대한 약속과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습니까?(참조 히 11:16, 벧전 1:6~8)
답:
모세가 애굽의 보좌를 거절하기로 결심한 것은 정치적으로 볼 때는 분명히 잘못된 결정이었다. 그는 애굽의 다음 왕이 되기 위해 애굽에 머물기로 결정할 수도 있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란 어렵지 않았을 것인데,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럴듯한’ 핑계를 대면서 그릇된 결정을 하기 때문이다.
2. 최근에 '그럴듯한' 핑계거리를 가지고 그릇된 결정을 내렸던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일로 인해 어떤 중요한 교훈을 배웠습니까?
답:
기쁨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을 알 때에 이르러 오지만, 즉각적인 결과는 종종 곤란하고 고통스런 것일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때 모든 문제가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큰 실망을 겪을 수 있다. 우리가 헌신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재물과 명예와 영향력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해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핍박을 당하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믿음을 따라 심지어 순교를 당하기도 한다.
교훈: 이 세상이 주는 행복은 피상적이고 일시적이지만, 우리가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영원히 지속될 뿐 아니라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다.
부가적용)
성경은 기쁨의 정의에 대하여 특별하다. 성경적 관점에서 기쁨은 방어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격적인 것이다. 방벽을 허물어야 한다. 우리는 안전한 구석에 숨기는커녕 삶을 향하여 전속력으로 달려가서 삶이 내놓는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 풍성한 삶은 풍성한 체험을 요한다. 기쁨의 긍정적 정의에 문제점이 하나 있다면, 우리가 죄많은 세상에 살다보니 풍성한 삶의 체험은 곧 고통과 실패의 체험도 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아시고도 여전히 기쁨을 말씀하셨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분이 말씀하신 기쁨은 달랐다는 점이다. 그것은 단기적인 욕망과 충동을 채우는 것과는 거의 무관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전부였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기쁨과 쾌락을 혼동하고 있을 때에 헌신과 목적과 훈련으로 초지일관 험한 길을 가셨고, 결국 십자가 너머에 가장 큰 기쁨이 있음을 아셨다.
금요일(1월 1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그리스도의 종교가 영혼의 낙담과 슬픔의 의복을 벗겨 주고 기쁨과 환희의 예복으로 입혀준다는 사실을 세상에 납득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다. 그리스도를 죄를 용서하시는 분으로 받아들인 모든 자들은 그분의 빛의 예복으로 옷 입었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죄를 제하시고 당신의 의를 그들에게 부여하신다. 그들의 기쁨은 충만해진다.
그리스도인들보다 기쁨의 노래를 부를 이유를 더 가진 자들이 누구이겠는가? 그들은 왕족의 일원 곧 하늘 왕의 자녀가 될 것을 기대하고 있지 않은가? 복음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아닌가?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꺼이 그리고 충만히 받아들일 때 하늘의 광명이 우리 삶에 깃들게 된다.”(엘렌 G. 화잇, 의료 전도자와 건강 교육자로의 부르심, 2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성경에 잘 알려진 몇몇 위인들의 생애를 돌아보십시오. 그들은 기쁨을 얼마나 경험하였을까요? 노아와 아브라함과 요셉은 어떠했을까요? 다니엘과 다윗과 예레미야는 어떠했을까요? 바울과 침례자 요한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2. 행복해질 수 있는 몇 가지 세상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런 방법들이 얼마나 효과가 있습니까? 그러한 행복은 모두 나쁜 것입니까, 아니면 그러한 행복도 나름대로 우리 삶에 필요한 것들입니까?
3.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얼마나 많은 행복과 기쁨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즉 병들어 고통당하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으며, 많은 영혼들이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행복을 가져야 합니까? 다른 사람들이 멸망해 가는 것을 알면서도 행복과 기쁨을 누리는 것은 이기적이지 않습니까?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나 한 주일 동안 실천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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