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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과 담대함(도입예화와 부가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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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9.08.26 01:54 조회수 6,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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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과 담대함

9월 5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56분)

 

 

도입)

「12세에 경기중학교 수석 입학하고, 15세에 경기고등학교 수석입학, 그리고, 고교 입학 4개월 만에 대입 검정고시 전국 수석, 16세에 서울 대학교 문리대 차석 입학하고, 21세에 미국 미시간 주립대 박사과정에 수석 합격했으며, 24세에 박사학위 취득, 24세에 미국 사우드 플로리다 대학 조교수가 되고, 27세에 MIT 원자력 공학과 연구원, 28세에 뉴욕 공대 전기물리학과 부교수가 되었으며, 43세에는 한국전력 사장, 그리고 51세에 과학기술처 장관」지금까지 열거한 이력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과학기술처 장관이었던 정근모 박사의 이력이다. 이 정도의 실력과 재능이라면, 아무리 험한 세상일지라도, 별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이 화려한 모든 것들이 어머니의 기도와 신앙 안에서 생활해온 결과일 뿐”이라고 솔직히 대답하였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간증을 하고 있다. 그의 아들이 만성신장염을 앓게 되자, 그는 그의 콩팥 하나를 아들에게 떼어주었다. 그러나 그 수술이 잘못되어, 아들이 황달에 걸렸다. 그리고 황달은 흑달이 되어, 아들은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 부부는 교회에 나아가, 그 아들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달렸음을 깨달으며, 밤새도록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과학과 의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다. 정 박사 부부는 그 아들을 끌어안고 울면서, 아들을 치유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정 박사는 그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정말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체험하는 순간들이었다. 이건 나의 전공인 과학의 힘으로도, 인간의 의지나 설득으로도, 부모와 자식이라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관계로도 해결할 수 없는 한계 상황이었다. 나는 인간의 창조주요 절대자인 하나님 앞에, 한없이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다.」모태 신앙인이었던 정 박사는, 그동안 교회생활에는 불충실하고 세상일에만 전념했던, 지난날의 생활을 회개하고 주님께 피함으로 이 같은 기적을 체험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교포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기도 하면서, 신앙생활에 열심을 다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야만 살 수 있다고 하는 확고하고 담대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기억절: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연구범위: 요 3:36, 행 4:29, 고전 9:27, 히 4:16, 요일 5:13~21, 계 12:9.

학습 포인트: 우리의 확신과 담대함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의 확신이 추측으로 변질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는 확신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실 것에 대한 어떤 보증이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있는가?

 

 

안식일 오후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인생에 있어서 확실한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세금이다." 그런데 확실한 것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인생이 불확실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일터가 얼마나 안전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질병과 테러, 전쟁과 자연재해 등으로부터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잠자리에 들 때 다음날 일어나리라는 보장도 없다.

이러한 현실을 접하면서 우리는 이러한 걱정거리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보지만 결국 우리의 노력도 안전을 보장해 주지는 못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떠하시며, 우리에게 주신 그분의 약속은 어떠한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확신과 담대함을 가질 수 있는가? 하나님과 더불어 관계를 맺는 것과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요한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일요일(8월 30일)

담대함을 가짐(요일 5:13~21)

 

 

도입)

사람들은 불안을 이기지 못해 술과 담배에 의지하고 어떤 사람들은 약물을 의지하기도 한다. 불안 병에 걸리면 사람을 만나기가 싫어지게 되고 나아가서 일을 할 수가 없어 결국 자살에 이르기까지 한다. 우울증이나 불안이나 스트레스를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가? 치유하는 비결이 성경에 다 있다. 염려를 다 주께 맡겨야 한다. 근심과 불안거리를 모두 다 주께 맡겨 버려야 한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라고 했다. 돌본다는 뜻이 이렇게 쓰인다. 살림을 돌보다. 아기를 돌보다. 환자를 돌보다. 건강을 돌보다. 라고 쓰인다. 그러니까 돌보다의 뜻에는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넘어지려는 사람을 붙잡아 주고, 옆에 있어주고 지켜준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게 맡기면 돌보겠다. 라고 하셨다. 그러면 채워주고, 붙잡아주고, 뒤치다 거리 해주고, 보호해 주겠다는 말씀하셨다. 잠16:3’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하셨다. 내게 주어진 일을 어떻게 감당하나 고민할 때에 주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맡겨 버려야 나의 부족한 부분이 채워진다. 그래야 흔들리지 아니한다. 그래야 길이 보이는 것이고 그래야 가야할 길 끝까지 달려갈 수 있는 것이다. 맡기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이 세상 어떤 위기보다 주님의 능력이 더 많고, 어떤 고통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다.

요한일서 5:14에는 '담대함'이란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확신, 담력, 혹은 진솔함(행 4:29, 31)이나 명백함(요 16:25, 29)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4:16과 10:19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고 하였다. 왜 그런가? 첫째,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해 보혈을 흘리셨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그들을 옹호하시기 위해 하늘로 승천하셨기 때문이다.

같은 용어가 요한일서 4:17에도 나오는데, 심판 날에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에 의존하기 때문에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의 확신은 그들 자신이나 그들이 행한 일에 근거하지 않는다. 이 확신은 전적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온다.

요한은 요한일서의 끝부분에서 “우리가 아노라”라는 말을 반복함으로써 이 담대함의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아노라”라는 말이 앞에서도 두 번 나오지만(요일 3:2, 14), 결론 부분에서 다섯 번이나 반복되면서 “담대함”의 개념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1. 다음 구절들에 의하면 우리는 무엇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까?(요일 5:13, 15, 18, 19, 20)

답:

요한일서 5:13에서 사도는 “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요한일서 5:15 이하에서 그는 “우리가 아노라”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는 우리의 기도가 들으신바 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요일 5:15). 요한일서 5:18에는 “우리가 아노라”라는 표현과 함께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약속이 따라 나온다. 요한일서 5:19에는 “우리가 아노라”라는 표현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하는 놀라운 개념이 소개되고 있으며, 요한일서 5:20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또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며,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 우리의 현재 상태와 미래의 운명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교훈: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뿐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지켜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부가적용)

환란과 고통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때로는 병에 걸리거나 돈 때문에 곤경에 빠지기도 한다. 가족이 아프거나 사고로 생명의 위협을 당하기도 하며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기도 한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유명한 설교가이자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 목사는 히틀러에 저항하다가 나치가 패망하기 1주일 전에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때 그는 교도관에게 "이것이 내 인생의 끝이 아니다. 또 다른 시작이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가 믿고 있는 믿음은 죽음 이후에 있을 자신의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고 이로 인해 그는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인생의 가장 큰 고통인 죽음의 순간을 또 다른 삶의 시작으로 바라보는 이 같은 믿음이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그 스스로를 담대하게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겠는가. 죽음은 잠시 우리의 생명을 멈추게 하고 잠들게 하지만 이 잠에서 깨어나면 우리는 하루저녁 자고 일어난 것처럼 우리 주님을 미구에 뵙게 될 것이다. 이 보다 그리스도인의 심령을 담대하게 하는 힘과 능력이 또 어디에 있을까?

 

 

월요일(8월 31일)

영생을 가짐(요일 5:13)

 

 

도입)

사도 요한은 서신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고 요한 일서를 기록하였다고 했다.(요일 5:13) 성도들이 영적인 진리를 알려고 하면 자신의 경험으로 알려고 해서는 안된다. 또한 다른 사람의 경험이나 지식에 의하여 영적인 진리를 알려고 해서도 안된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이 붙들어야 할 진리는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의존하여야 한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이 알고 확신하여야 할 진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고 확신하여야 한다. 우리가 가진 영생에 대한 확신을 성경을 통하여 분명히 인식하고 가지지 못한다면 자신이 영생을 가졌다는 또 다른 확신을 세우기 위하여 계속하여 다른 수단이나 방법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1. 요한일서 5:13에서 우리는 어떤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까?

답:

이 구절에는 요한이 그의 서신을 기록한 중요한 이유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독자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기 원했다. 그들은 이미 영생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아야만 했다. 영생은 현재적 실제이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마지막 부분에서도 비슷한 진술을 하였다.(요 20:30~31)

요한일서 5:13은 신약에서 영생에 관해 다룬 다른 구절들과는 차별된다. 다른 구절들은 영생의 조건이나 약속을 언급하고 있지만(예, 요 3:36), 이 구절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미 영생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확신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괜찮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확신을 갖기를 원하신다. 모세(출 32:32), 베드로(벧전 5:1), 바울(딤후 4:7~8),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엡 2:8), 골로새 신자들(골 1:12~14)도 이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2. 하지만 어떻게 하면 이 확신이 하나의 추측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까?(참조 마 10:22, 고전 9:27, 계 3:11)

답: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구원의 “확신”을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는다”는 식의 “무조건적인 보증”으로 변질시켰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도, 그리고 우리를 하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삶을 살아도 괜찮다는 말이 되고 만다!(갈 5:21, 계 21:8).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순결하게 지키기가 어렵다는 것을 안다. 만약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교리를 받아들인다면 어떠할지 상상해 보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 확실성은 우리 자신의 선택에 의해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우리는 날마다 계속해서 순종과 회개와 믿음으로 자신을 주님께 굴복시킴으로써 생명의 면류관을 굳게 잡을 필요가 있다. 사단이 두루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에(벧전 5:8) 우리는 항상 경계하고 기도해야 한다.

교훈: 우리는 물론 영생의 확신을 가져야 하지만,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식의 확신은 우리를 방종으로 이끌어 갈 위험이 있다.

 

 

부가적용)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Once Saved, Always Saved”(예수를 믿음으로 일단 한번 구원받으면, 품성과 믿음의 영적 성장에 상관없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 상관없이 무조건 구원받게 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라는 구원론을 받아들이고 있다. 구원의 문제가 이처럼 매혹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기만당하고 있다. 만약 신자들의 구원이 단 한 번의 믿음으로 무조건적으로 보장된다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신자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 교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오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영생이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행위의 결과이다. 구주를 믿는다는 것은 구원을 위한 일회용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그분을 구주요 하나님으로 믿고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며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매일의 삶에서 그분과의 교제를 갖지 않고 그분을 신뢰하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르지 않고 하나님 말씀과 뜻대로 살지 않는 자들의 삶의 열매는 언제나 가시나 엉겅퀴를 내며 살게 될 것이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만 선행은 예수 그리스도와 끊임없는 관계와 교제를 가진 자들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열매일 뿐이다. 히브리서 6:4-8에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고 말한다.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으면 우리의 자아와 생각과 행동은 쉽게 부패될 것이다. 우리가 주를 믿는다는 것은 매일 매 순간, 우리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주님이 우리의 마음에서 약간만 멀어지게 되어도 아주 쉽게 타락하기 쉬운 것이 우리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말씀으로 다가가 우리가 받은 이 귀한 구원을 보존하기 위해 두렵고 떨림으로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주님을 믿는 참된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화요일(9월 1일)

그분의 뜻을 따라서(요일 5:14~17)

 

 

도입)

미국의 오랜 시에 [거장의 손이 닿을 때](The Touch of the Master's Hand)가 있다. 내용은 이렇다. 경매장에 낡은 바이올린이 있었는데 3달러까지 부르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이상은 없었다. 이때 한 노인이 나타나 바이올린의 먼지를 털고 마치 보물을 다루듯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 구석구석 닦고, 현들을 조여 음정을 잡고 연주를 시작했다. 그 아름다움은 천사의 음악 같아서 청중들을 황홀하게 하였다. 노인은 연주를 끝내고 난 뒤 감회 깊은 음성으로 중얼거리기를 “잘 있었느냐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를 40년 만에 너를 만졌구나”하며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경매는 갑자기 활기를 띠고 결국 이 바이올린은 3천 달러에 낙찰된다는 내용이다. 이 시는 하나의 신앙시로 간주되는데 누더기가 된 인간, 죄와 허물로 값없는 인간, 나 같은 죄인도 거장(Master 주님)의 손길이 닿을 때 아주 새로운 가치가 부여 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의 삶을 연주해 주실 그분께 우리의 자아를 맡기는 믿음, 또한 그분의 뜻을 따라서 살기로 결심하고 우리 자신을 그분께 맡기고 사는 삶이 중요하다.

1. 요한일서 5:14~15은 우리에게 어떤 약속을 줍니까? 그 약속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답:

우리는 모든 기쁨과 부담과 필요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그분께 재정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다. 그분께 자녀 문제를 도와달라고 말씀드릴 수 있다. 우리는 중한 질병을 낫게 해달라고 그분께 아뢸 수 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수표를 보내주시고, 아이들을 바로 잡아주시며, 무서운 질병을 치료해주시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그분께서는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라는 말씀을 덧붙이셨으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않도록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릴 때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대기 목록에 올려놓지 않으시고 용서의 확신을 주신다. 기도가 마쳐졌을 때 실제로 용서가 주어진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자녀가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드리면, 그분께서는 이러한 기도를 즉시 응답해 주신다. 성경에 하나님의 뜻은 명령이나 약속으로 나타나는데, 우리가 그분의 뜻에 굴복한다면 우리는 그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끄실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씀을 덧붙이고, 주님께서 최선의 길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 가운데 믿어야 한다.

요한일서 5:16~17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구절이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학자들마저도 의견이 나뉜다(어떤 이들은 그것이 성령을 거스르는 죄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죄가 불의이며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요한이 이 구절들에서 말한 죄들의 특이한 점은 무엇인가? 대답하기 쉬운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요한이 말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그가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교훈: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여쭈어야 한다. 나의 모든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고자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진다.

부가적용)

일반적으로 '맡긴다'라는 말은 자신이 어떠한 일을 감당할 수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의뢰하거나 부탁하는 것을 뜻한다. 즉,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 일을 맡기든, 가까운 사람을 통하여 일을 맡기든 '맡긴다' 라는 말은 상대방에게 대하여 믿고 의뢰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를 맡겼을 때에는 나의 방법이 아니라 도움을 주실 분의 뜻을 물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인간적인 힘과 노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거나, 뜻하지 않은 고난이나 어려움과 시련을 만나게 될 경우 그것이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한 일이나 상황일수록 하나님을 찾아 자신의 처지를 고하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구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도와주시기를 바라면서도 정작 범하는 어리석음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내 영혼의 연약함과 무능력함을 고하고 나의 문제(고난, 시련, 연단, 어려움, 역경 등등)를 내가 할 수 없기에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뢰하고 의지한다는 것이며 그분께서 나의 길을 최선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나의 문제를 그분께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뜻대로 되도록 마음을 열어야 할 것이다.

 

 

수요일(9월 2일)

보호를 확신함(요일 5:18~19)

 

 

도입)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대쟁투”는 재림교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표현이다. 이 어휘가 성경에 직접 표현되어 있지는 않으나 사상은 풍부하게 나온다. 바울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고 하고 “선한 싸움”(딤전 1:18)을 싸우도록 권고하고 있다. 엘렌 G. 화잇의 저술은 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 사이에 전개되어 온 대쟁투가 기본적인 모티브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각 시대의 총서가 각 시대별로 이 대쟁투의 전개과정과 그 주제들을 취급하고 있다. 즉, 엘렌 G. 화잇의 전 사상의 기조는 이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대쟁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치열한 대쟁투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하며 그분께서 우리를 돕고 계시다는 확신 속에 살아가야 간다. 시 91:9-12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라고 우리의 삶을 보호하실 것을 보증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5:18~19에서 요한은 두 번이나 “우리가 아노라”라는 말을 하였다. 이 두 절은 각각 이 진술로 시작된다. 그러나 요한은 단지 지식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1. 18절과 19절은 어떤 간접적인 도전을 던져주고 있습니까?

답:

18절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오는데, 첫 번째 표현은 모든 신실한 신자를 가리키고, 두 번째 표현은 예수님을 지칭한 것이다. 헬라어 원문에는 시제(時制)의 차이가 있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는 첫 번째 표현은 거듭난 사람들의 경험을 언급한 것으로써(요 3:3, 5, 요일 3:9), 중생의 효력이 지속되는 것을 묘사하는 완료시제가 사용되었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두 번째 표현에는 과거에 일어난 특정한 사건을 언급하는 시제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묘사한 것으로, 그분께서 마리아의 몸을 빌려 베들레헴에서 나신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 적용된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말은 그분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고, 심지어 우리 중의 하나가 되신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2. 요한일서 5:18~19은 우리에게 어떤 위안을 줍니까?

답:

이 두 절에 각각 ‘악한 자’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참조, 요일 2:13~14, 3:12), 사단을 가리킨다. 요한은 사단을 마귀 또는 옛 뱀이라고 불렀는데(요일 3:8, 10, 계 12:9), 특히 요한계시록 12:9에는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대쟁투가 잘 묘사되어 있으며, 이 대쟁투는 이미 짧게나마 요한일서 5:18~19에 암시되어 있다.

요한은 18절과 19절에서 세상을 악한 자의 활동 무대로 언급한다. 이 싸움의 반대편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함께 서 있다. 우리 신자들은 그분에 의해 보호를 받는다. 예수께서는 사단이 그들을 만지지도 못하게 지키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죄에 반대하고 유혹에 저항할 수 있다.

교훈: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대쟁투에서, 그리스도의 편에 선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분의 보호를 받으므로 사단이 저들을 만지지도 못한다.

 

 

부가적용)

요한 웨슬레가 미국 선교를 위해 대서양을 건너고 있을 때 큰 풍랑을 만났다. 그때 그는 구원의 확신이 없는 선교사였다. 풍랑이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선실에서 벌벌 떨고 있을 때 아련히 갑판 쪽에서 찬송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의아해서 나가보니 모라비안 교도 몇 사람이 풍랑이 이는 그 와중에 갑판에 꿇어 앉아 찬송(503장)을 부르고 있었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웨슬레는 저들의 평안에 압도된 채 그들에게 “당신들은 풍랑이 두렵지도 않소?”라고 물었다. 그들은 대답하기를 “두렵기는요, 오히려 더 빨리 갈 수 있으니 감사하지요.”라고 대답했다. 웨슬레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그때 풍랑보다 그들의 고백이 더 큰 충격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모라비안 형제들과 같은 담대함과 평안함은 어디서 오는가? 그는 그 비결을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낸 것이다. 바로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믿음에서 만이 이런 담대함이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풍랑을 만나고 벼랑 끝에 섰을 때에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흔들림 없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만이 이 같은 담대함이 가능하며 이 같은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뻐하게 하신다. 다윗의 기도를 보면 시 17:8-9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이 세상에는 악인보다는 선인을 해치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를 눈동자 같이 지켜주심으로만 승리할 수 있다. 이 선악의 치열한 대쟁투 속에서 우리 주님은 가장 예민한 눈동자와 같이 우리 곁에 서서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다.

 

 

목요일(9월 3일)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짐(요일 5:20~21)

 

 

도입)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이 세상과 우주 뒤에 어떤 막연한 보편적인 세력이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인격체로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의미는 내가 그분을 매우 가깝게 안다는 것이다. 환언하면 내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서 아는 것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그분을 “아바 아버지”(롬 8:15)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몇 가지 사항들을 아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안다. 그들은 그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안다는 의미이다.

요한은 다시 “우리가 아노라”라고 진술한다. 우리는 그분이 참되신 분이심을 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 보이셨다는 지식은 단지 머리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도록 이끌어야 한다.

1. 요한일서 5:20에 따르면 참되신 한 분은 누구입니까?

답:

요한은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그분”이라는 인칭 대명사를 아버지나 아들, 혹은 이 두 분을 동시에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했는데, 이는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기 때문에(요일 2:23)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요한일서 5:20에는 “참되다”라는 말이 세 번 나온다. 첫 번째는 하나님 아버지를 지칭한 것이 분명하다(참조 요 7:28).

두 번째 언급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라(요일 5:20). 하나님의 아들은 참되신 분이시다. 요한일서 2:8에도 “참되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예수님을 묘사하는 말이다.(참조 계 3:7, 14)

마지막으로 “참되다”라는 말은 문장 안에서 나타난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 이 문장은 하나님 아버지나 예수님, 혹은 두 분 모두를 가리킨다. 성경 해석자들은 이것에 대해 의견이 나뉘지만 예수님과 연결시킬 때 의미가 가장 완전하게 통한다.

2. 요한일서 5:21의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답:

요한은 지금까지 우상숭배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그릇된 개념과 그러한 개념이 교인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씨름하였다. 그러면 요한은 왜 그의 서신의 마지막 부분에서 지금까지 언급한 적이 없는 주제를 끌어낸 것일까? 아마도 요한은 그리스도에 대한 거짓된 견해를 우상숭배로 간주했던 것 같다. 즉 예수님 안에 계셔서 모든 참된 신자들에게 영생과 담대함을 주시는 아버지 대신에 거짓 신들을 섬기는 것을 우상숭배로 보았던 것이다.

교훈: 요한은 그의 첫 번째 서신의 마지막 부분에 참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분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우상숭배에 비유했다.

부가적용)

인격적인 친밀함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많은 정보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신체적, 정서적, 의지적인 만남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모두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위기의 순간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변호하였다. 위기의 순간에도 그들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를 믿었다. 위기의 순간에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강하였고 용맹함을 드러내었다. 위기의 순간에도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였다. 우리는 그분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하나님을 안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마음과 그 뜻을 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 잘 나타나 있는가? 하나님, 영광스러운 우리 아버지의 마음이 가장 분명하고 명확하게 나타나 있는 곳이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독생하신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했던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서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갈보리 그 언덕에서 이루어졌던 엄청난 십자가의 사건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십자가를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갈기갈기 찢어졌는지 그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그 모든 고통이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이라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금요일(9월 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엘렌 G. 화잇, 실물교훈, “주기 위하여 구함”(147~148), 선지자와 왕, “이스르엘에서 호렙까지”(157)

“우리가 세상의 축복을 간구할 때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지체될 수도 있고 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른 것을 주실 수도 있으나, 우리가 죄로부터의 구원을 구할 때에는 그렇지 않다. 우리를 죄에서 깨끗케 하셔서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거룩한 생애를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그의 뜻이다.”(시대의 소망, 266)

“만일 병자의 생애가 그분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가 살기를 기도할 것이나, 그럴지라도 우리의 뜻대로 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대로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소망을 전지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아무 염려 없이 완전한 신뢰 가운데 모든 것을 그분께 의탁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은 확고하여지고 더욱 의지할 만하게 된다. 우리는 약속을 가지고 있다. 그분의 뜻과 일치하게 간구하면 그분이 들으실 줄을 우리는 안다. 우리의 간구는 명령하는 형태를 취할 것이 아니라 그분께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그분이 행하시도록 간청하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교회증언, 2권, 14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확신' 문제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주로 무엇 때문에 생깁니까? 이러한 문제로 고민하는 이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습니까?

2. 성경에는 분명히 죄에 대한 승리의 놀라운 약속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왜 많은 이들이 반복해서 같은 죄에 빠지는 것입니까?

3.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대쟁투의 실체는 어떻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우리의 공동체와 가정에서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습니까? 사단과의 싸움에서 우리 개인이나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까?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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