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과 권력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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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과 권력 투쟁
9월 26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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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난무하는 교회 공동체 안에 '사람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증거를 받은 참된 지도자가 필요하다. 말로 자기의 경건의 모습을 치장하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다. 말로 사랑하고 말로만 위로하고 말로만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하는 자들이 교회에 넘쳐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리더가 되는 경우가 많아 교회가 시끄러워졌다. 거룩한 영향력이 없는 사람들이 교회의 방향을 좌지우지하는 경우가 많이 나타나 다른 심령에게 상처를 많이 주고 있다. 요한삼서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등장한다. 가이오와 디오디레베는 같은 소아시아 교회를 섬기는 중직자들이었다. 한사람은 봉사 생활을 신앙생활의 성장과 승리의 디딤돌이 되게 한 반면, 한 사람은 봉사 앞에서 점점 메마르며, 자신과 남을 힘들게 하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1절부터 8절까지는 가이오가 나타난다. 가이오는 사도요한이 칭찬하는 좋은 사람이다. 또한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9-12절에는 디오드레베가 나타난다. 그런데 그는 사도 요한이 책망한 사람이다. 요한 삼서는 가이오와 디오드레베의 삶을 비교해 가며 우리가 가이오와 같은 삶을 살도록 권하고 있다.
기억절: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요삼 1:11)
연구범위: 사 14:13~14, 막 9:35, 고전 12:7~13:13, 빌 2:3, 요한삼서, 계 14:6.
학습 포인트: 요한은 이 서신을 누구에게 보냈는가? 가이오(Gaius)는 어떤 좋은 품성을 가진 사람이었는가? 이 교회에 어떤 형태의 권력 투쟁이 진행되고 있었는가?
안식일 오후
권력 투쟁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제국의 통치권이나, 회사의 지배권이나, 종교적 지위나 권력을 위한 투쟁이나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은 보기에 흉할 뿐 아니라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참으로 하늘에서의 대쟁투는 사단이 창조주이신 예수님께만 속하고 피조물에게는 주어질 수 없는 지위와 권세를 탐하므로 시작되었다. 불행하게도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정신이 나타날 수 있다.
요한의 마지막 편지인 요한삼서는 초기 교회들 중 하나에서 발생한 권력 투쟁에 관해 다루고 있다. 한쪽 편에는 사도 요한, 가이오, 데메드리오가 있고, 반대편에는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하려고 애쓰는 디오드레베가 있었다. 지역 교회에서 간혹 볼 수 있는 권력 투쟁의 모습이 아닌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지 않은가?
일요일(9월 20일)
장로와 가이오(요삼 1:1~4, 13~15)
도입)
요한 사도가 요한 삼서를 기록할 때는 90살이 가까운 나이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하고 있다. ‘장로’라는 호칭 속에는 연장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장로 요한이 가이오를 소개할 때, ‘사랑하는 가이오’ 또는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는 장로 요한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장로 요한에게만 사랑받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다.
요한삼서는 신약의 빌레몬서와 디모데전서 및 후서, 그리고 디도서와 함께 회중이 아닌 개인에게 보내진 몇 안 되는 서신들 중 하나이다.
흥미롭게도 요한은 여기서 자신을 장로로 소개하였다(요삼 1:1). 그러나 요한은 사도이지 지방 교회의 장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렇게 소개했는가? 몇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1) 장로라는 칭호는 지위나 나이 혹은 둘 다를 의미할 수 있다. 요한은 아마도 연로한 사람들 중에 속했을 것이다. (2) 요한은 이 칭호를 사용함으로 이 편지가 사적인 편지가 아니라 공식적인 서신임을 암시했다. (3) 이 칭호는 그에게 존경과 권위를 주는 칭호이다. (4) 베드로전서 5:1에서도 베드로는 장로들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비록 사도이지만 함께 장로 된 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요한은 아마도 이러한 관례를 따랐을 것이다. (5) 요한이 사용한 장로라는 칭호는 디오드레베의 태도와는 달리 베드로의 겸손과 동료애를 나타낸 것이었다.
1. 요한삼서 1:1~4은 가이오에 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
답:
요한은 가이오와 더불어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요한은 그를 `사랑하는 가이오'라고 불렀고 그를 참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는 1절과 2절에서 세 번이나 "사랑하는"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가이오와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2.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우리는 그 사랑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습니까?(참조 고전 13장)
답:
요한은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기뻐하면서 3절과 4절에서 가이오를 아는 형제들이 그의 그리스도인 태도와 생활 방식을 칭찬하였다고 두 번이나 언급했다. 요한은 속히 가이오를 직접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하였다. 가이오에 대한 언급을 통해 요한을 잘 알고 그를 후원하는 신자들이 많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교훈: 요한은 그의 세 번째 편지에서 자신을 장로로 겸손히 소개하면서, 그가 참으로 사랑하는 가이오가 진리 안에 행한다는 소식으로 인해 크게 기뻐하였다.
부가적용)
가이오는 교회를 찾아오는 많은 나그네들과 무명의 전도자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많이 사용해야 했다. 그에게 대접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곳에서 그를 칭찬했다. 그는 진정 정성을 다해서 남을 대접했던 것이다. 당시에 보수 없이 복음을 전하는 많은 전도자들이 그의 앞을 지나갔고, 또 신앙의 박해를 피해서 떠도는 많은 사람들도 그의 앞을 지나갔다. 그는 자기가 가진 물질을 들여서 교회를 찾는 많은 이들을 공경했다. 결국 그는 이일을 통해서 생명을 살리며, 하늘나라를 확장하는 선교 사역에 깊이 동참하며, 진리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었던 것이다. 봉사는 자기 헌신이 없이는, 자기의 희생이나 드림이 없이는 그 빛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섬기고 대접하는 이면에는 항상 원망과 불평의 독이 존재한다. 우리가 가이오와 같은 아름다운 봉사자로 남기 위해서는 우리가 진리 안에 거하고, 그 진리를 따라 생활해야 한다. 진정한 봉사자는 어떤 일을 얼마나 하느냐 ? 따라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큰일을 행했느냐? 에 따라서 평가되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봉사자는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했느냐?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했느냐? 로 평가되는 것이다. 가이오는 나그네들을 잘 대접하였다. 얼마나 잘 하였는지 그 나그네들은 교회 앞에서 그 일을 증언하였다. 온 교회가 그 일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이 나그네들이 그냥 나그네들이 아니라 형제이면서 주의이름을 전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1:7) 이들은 바로 복음 사역자들이었다. 사도는 가이오를 칭찬하면서 그의 행실을 신실한 일이라고 한다(1;5)그것은 가이오가 행한 일들이 바로 신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월요일(9월 21일)
가이오와 교회를 위한 그의 봉사(요삼 1:5~8)
도입)
예전에는 지금처럼 숙박시설이 잘 발달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여행을 하면서 먹고 자는 문제가 매우 힘든 일이었다. 특히 복음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나그네처럼 항상 순회하며 전도하였는데 제일 힘든 문제가 바로 이 숙박의 문제였다. 그런데 가이오는 언제나 순회전도자들이 자신의 집에 방문을 하면 최고의 대접을 해서 보냈다. 좋은 음식으로, 편안한 잠자리로, 여행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여 줌으로 순회 전도자들에게 가이오는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듣게 되었다. 이렇게 가이오가 사랑을 베푼 사실이 장로 요한에게 들렸다. 가이오는 사랑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그 사랑도 베풀줄 아는 사람이었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을 보면 그가 얼마나 사랑받기에 합당한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사랑받는 것도 중요하다.
1. 요한삼서 1:5~8을 읽고 요한이 말하는 바를 자신의 말로 적어 보십시오. 여기서 어떤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답:
요한은 두 번째 편지에서 환대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이설을 가르치는 떠돌이 교사들을 환대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진실한 신자들은 적그리스도들을 지원할 수 없다. 요한삼서에서 사도는 다시 환대의 문제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순회 선교사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강조한다. 그들은 자비(自費)로 복음을 전파하였으나 하룻밤 묵을 장소와 음식이 필요하였다. 요한이 이미 언급한 이설을 가르치는 교사들과는 달리, 이 선교사들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이었다.
가이오는 이 선교사들을 후원하였고 그들을 따뜻이 대접하였다. 그 선교사들은 깊은 인상을 받고 가이오에 대해 좋게 말해 주었다.
여기서 사도는 단지 접대하는 일이나 어떤 사람에게 하룻밤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과 선교의 일을 후원하는 원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가이오가 이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푼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있다. 가이오의 행동은 복음전파 사업을 위해 그 자신을 내어 준 개방성과 자발성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가이오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 주님께서는 이 진리를 온 세상에 전파하게 하시려고 우리 신자들을 택하셨다.
2. 요한계시록 14:6을 읽으십시오. 여기에 언급된 천사는 누구이며, 그의 사명은 얼마나 광범위한 것입니까?
답: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특히 재림신자로서 세상 어느 곳에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돕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의 신분이 무엇이든, 우리의 역할이 무엇이든 우리 모두는 담당해야 할 고유한 분야가 있다.
교훈: 가이오는 순회하는 선교사들을 따뜻이 환대함으로써 그들의 사역을 지원하였다. 우리도 가이오처럼 선교 사역을 후원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 한다.
부가적용)
만약 우리가 봉사에 대해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 때문에 어떤 문제가 생길 우려는 크게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봉사의 생활을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봉사야 말로 섬김의 본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요, 성도의 신성한 의무인 것이다. 예수님을 오래 믿어온 사람들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알고 있는 인식만큼 봉사가 되지 않는 데에 자신과 주변에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또한 처음 예수를 믿으면서 봉사를 하는 분들에게는 봉사 자체에서 신선한 기쁨을 느끼기도 하지만, 반면에 자기의 기분을 넘어서는 어려움 앞에서는 쉽게 무너지는 연약한 점을 안고 있다. 봉사라고 하는 것은 남을 섬기는 것이요, 남을 대접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자의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지만, 그러나 강요된 의무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닌 자원하는 의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봉사가 없는 삶이 존재할 수 있느냐 ? 고 극단적인 질문을 한다면 저는 분명히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섬김과 남을 대접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해야 된다고 하는 의무감에는 항상 위험성이 있기 마련이다. 베드로전서 4장9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 ." 대접이라고 하는 것은 강요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접과 원망은 종이의 양면처럼 붙어있는 것이다. 대접이 원망으로 돌아설 수 있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렇다고 대접하는 것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봉사의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 반드시 해야 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위험성을 분별하지 못하면 우리는 교회의 생활에서 기쁨을 잃고, 신앙성장에 주춤거리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화요일(9월 22일)
디오드레베(요삼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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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드레베는 가이오와는 정 반대의 일을 하였다. 가이오가 나그네들로 표현된 복음 사역자들을 잘 영접한 것과는 정 반대로 디오드레베는 복음 사역자들을 쫓아내었다.[1:9] 그가 쫓아낸 이유가 또한 악한 것이다. 그가 사도를 비롯한 복음사역자들을 쫓아 낸 것은 그가 으뜸 되기를 좋아 한 까닭일 것이다[1:9] 높아지려는 것에서 연원 하는 시기심은 무서운 악을 가져오기 쉽다. 디오드레베는 이에 그치지 않고 두 가지 더 무서운 악을 저질렀다. 그것은 그가 사도와 형제들을 비방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도와 형제들을 맞이하려던 다른 사람들을 금하여 그들을 교회에서 내 쫓은 것이다[1:10]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악을 행하는 사람이 선을 행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고 주님을 위해 복음 사역을 하는 사람들을 비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사람이 교회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막 9:35)
1. 이 구절에서 어떤 중요한 그리스도인 원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 자신은 어떻게 그것을 따를 수 있습니까?
답:
요한은 가이오와 그의 봉사를 언급한 후에, 이제는 가이오가 속한 교회의 지도자였던 디오드레베의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한다. 이 사람은 분명히 많은 문제의 발원지였으며 요한은 적절한 시기에 그에 관한 문제를 처리하기로 결심하였다.
2. 요한삼서 1:9~10에서 디오드레베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아는 적은 정보를 통해 볼 때, 그는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완전히 반대되는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습니까?(참조 사 14:13~14, 마 12:37, 18:36, 빌 2:3)
답:
이 디오드레베가 누구이든 간에 그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교인들은 그에게서 압력을 받기도 하고, 기본적인 그리스도인 호의를 다른 이들에게 베풀었다는 이유로 출교를 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디오드레베는 교인들을 통제하는 유일한 지도자로 군림하기 위해 시도하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권력에 대한 욕망과 복음에 대한 열정을 혼동했던 모양이다. 그는 거만하게 사도 요한과 다른 이들의 권위를 거부하였다. 디오드레베는 더 나아가서 요한을 비방하기까지 하였다.
그의 태도는 더 넓은 차원에서 교회를 돌보는 사람들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와 같은 태도는 교회의 특성과 교회에서의 교인들의 역할을 크게 변질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교훈: 디오드레베는 교회 안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시도하고 있었는데 사도 요한은 그에 관한 문제를 처리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부가적용)
디오드레베는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고, 자기의 편이 아니면 폄하하며, 봉사를 자기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이 하는 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이 세 가지 모습을 멀리 있는 타인의 모습에서 찾는다면 의미가 없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 속에서도 혹여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성향, 자기편이 아니면 폄하하는 모습, 자기만 봉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는 사람도 못하게 가로막는 모습,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우리 안에서도 쉽게 발견될 수 있는 모습이다. 봉사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고 신령한 기쁨으로 뛰어 오르게 하기 위해 주신 계단과 같은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인하여 자신의 영혼을 피폐하게 하며, 남의 시험에 빠지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디오드레베는 교회의 중직자이면서 그러한 일을 행했던 것이다. 봉사자에게 가장 으뜸 되는 적은 으뜸이 되려 하는 죄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만찬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가 더 으뜸이 될 것인가 ? 하는 것으로 다툼을 벌렸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섬김을 위해 오셨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시고, 수건을 가지고 허리에 동이시고 차례대로 제자들을 발을 씻기셨다. 그리고 너희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으뜸 되기를 좋아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는 섬기는 자가 아니라 섬김을 받아야 할 자로 자처한다고 하는 것이다.
수요일(9월 23일)
데메드리오에 대해 증거함(요삼 1:11~12)
도입)
인간의 본성 중에 하나인 '자기의 이름을 높이려는' 심리는 사람이 모여 한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곳에서 나타난다. 특히 교회에서 목사를 쫓아내고 장로의 권위를 차지한 사람들에게서 많이 나타나고 성경공부를 인도하거나 교회모임을 인도하는 리더자에게서도 나타난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찬양인도자들에게서도 나타나며 다른 사람들에게서 '잘한다'라는 칭찬을 많이 받는 사람에게서도 나타난다. 또 과도한 자기희생을 동반한 수고와 노력을 쏟아 모임을 부흥시키려는 사람들에게서도 흔히 나타나는 현상 중에 하나가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또 다른 경우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특히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이혼한 여자들 또는 가정에 문제가 있는 여자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았을 때에도 흔히 나타난다. 이런 경우에는 자신의 약점으로 인한 고통을 '성령의 은사'을 받은 것을 통해 보상받으려는 '보상심리'로 나타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중생경험을 크게 경험한 초신자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자기가 경험한 성령의 인치심을 너무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물에 물탄듯 신앙생활 하는 기존신자와 교회를 강하게 '순수성상실'이란 단어로 공격하기도 한다.
1. 요한이 요한삼서 1:11을 기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원칙과 반대되게 행동한 교회 지도자를 경고한 문맥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이 구절을 통해 말하고자 한 핵심은 무엇이었습니까?
답:
11절은 전환하는 문장이다. 요한은 디오드레베에 관해 말한 다음 데메드리오에 관해 말하기 위해 이 구절을 연결고리로 사용하고 있다. 디오드레베는 악을 대표한다. 거만하고 야심이 많은 이 지도자는 분명히 악에 속한 사람이었다. 반대로 가이오의 모본을 따른 데메드리오는 선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2. 데메드리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요삼 1:12)
답:
사도행전 19:23~29에도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은세공업자로,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곳에서 소동이 일어나게 한 장본인이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데메드리오와 동일인이라는 증거는 없다.
데메드리오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사도 요한의 동역자요 후원자였으며, 순회 선교사 중 하나였을 것이다. 요한은 디오드레베를 대면하려 할 때 데메드리오가 동행해 주기를 원했을 것이다.
우리가 데메드리오에 관한 이 구절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영향력'이다. 이 구절을 다시 읽어 보라. 누가 데메드리오의 신실함에 대해 추천했는가? 많은 사람들이 추천해 주었다. 만일 우리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 삶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추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우리의 삶과 존재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더 이상 발전의 여지가 없을 만큼 완벽해야 된다는 의미가 아니고, 우리가 실수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며, 우리의 말을 듣고 우리에게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과연 우리는 어떤 종류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교훈: 데메드리오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대표한다. 사람들은 그의 신실함을 칭찬하였고 그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았다.
부가적용)
디오드레베는 교회에서 최고의 지도적 위치에서 활동한 사람이다. 그러나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한 지도자임을 자칭하며 전도자들을 배척한 디오드레베를 악하다고 말하는 요한은 이를 본받지 말고 데메드리오와 같이 선한 것의 증인이 되어줄 것을 강조한다. 데메드리오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의 말씀으로 비춰 보아도 사도들이 보아도 “참된”사람이었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였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그렇게 참되다고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신실함이 인정할만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디오드레메 같은 사람이 많으면 교회는 사단에게 이용을 당하고 쉽게 무너지게 될 것이나 데메드리오 같은 사람이 많으면 교회는 부흥하게 될 것이다.
목요일(9월 24일)
초기 교회의 지도력 위기(막 10:42~44)
도입)
지도자는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다. 누구라도 자신의 언어와 행동을 통하여 자신 아닌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조그만 영향이라도 주는 사람은 지도자이다. 세상에 어떤 누구도 일방적인 지도력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 누구도 추종자 또는 피교육자일 수만도 없다. 사람은 누구든지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우리 모두는 지도자이며 동시에 지도를 받는 피지도자이다. 좋은 지도력은 주위 사람들에게 거룩한 영향력을 끼쳐 좋은 평판을 갖게 마련이다. 반대로 나쁜 지도력은 성별 되지 못한 영향을 주며 악평을 얻게 마련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대로, 적어도 요한의 교회들 중 하나에 지도력의 위기가 있었다. 요한삼서에 따르면 그 문제는 신학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고, 오히려 개인적 야망과 교회의 운영 방식을 바꾸는 것에 관한 문제였다. 그러나 종종 싸움이 시작되면 한 문제에서 다른 문제로 옮겨가는 것이 예사이다. 이 경우에도 장기적으로는 교회의 교리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 교회에 있었던 권력 투쟁과 독자적으로 나가려는 욕망을 주목해 보았다. 이것은 오늘날 지역 교회가 세계 교회의 지도 체계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행동하려는 독립교회 제도의 개념과 유사하다. 이것은 신약성경의 모델이 아니다.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백성이요 몸이다. 또한 모든 신자들은 각각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벧전 2:9). 각 사람은 교회에 필요한 영적 은사를 받았다(고전 12:7~31).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분은 신약에서 생소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부르셔서 교회 지도자로 세우시고 그들에게 은사를 주신다. 이 사람들은 존경을 받아야 한다. 지도자들은 전혀 실수가 없는 사람들이 아니며, 그렇게 가장해서도 안 된다.
지도자는 물론 이끄는 사람이지만 목자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데, 그리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다른 지체들에게 모본이 되어야 한다. 지도자의 자격은 구약과 신약에 잘 묘사되어 있다. 신약에서 감독(bishop)과 장로(elder)가 서로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었으나(행 20:17, 28) 역사를 통해 성직자 계급 제도가 생기면서 변질되고 말았다.
1. 다음 구절들은 교회가 어떻게 다스려져야 한다고 말합니까?(막 10:42~44, 행 6:1~7, 15:6, 22~25, 딤전 4:14, 약 5:14)
답:
성경은 교회 안에서의 혼돈과 무질서를 반대한다. 그러나 예수님도 강조하셨듯이 교회 안에서의 지도력은 섬김의 지도력이어야 한다. 초기교회는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장로들에 의해 다스려졌다. 교회 전체 혹은 교회의 대표자들에 의해 의사 결정이 이루어졌다.
교훈: 초기교회에는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분이 없었고 모든 신자가 은사에 따라 섬겼다. 이들 중 지도력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교회를 이끌어 갔다.
부가적용)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밀라노의 한 유명한 백작의 부탁으로 최후의 만찬을 3년간 그렸다. 그림 한 장을 그리는데 3년이나 걸렸으니 얼마나 훌륭한 작품이었겠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 그림을 백작에게 보여 주기 전에 먼저 미술가인 친구에게 보여주었다. 친구가 깜짝 놀라다. “우와~! 대단한 걸작이다. 특히 예수님 손에 있는 잔이 정말 빛이 나는군” 친구의 말이 끝나자마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붓으로 그 잔을 지워버렸다. “예수님 얼굴보다 더 빛나는 것이 있어서는 안돼. 예수님 얼굴이 가장 빛이 나아야지, 예수님의 손에 있는 잔이라도 예수님보다 더 빛이 나면 안돼” 그리고는 예수님의 손을 테이블 위에 있는 손으로 고쳐 그렸단다. 오직 예수님만 빛이 나도록 그리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의 봉사에 오직 예수님만 높이려는 지도가가 많이 생겨난다면 이 교회는 참으로 희망이 넘쳐날 것이다.
금요일(9월 2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요한복음 13:1~12, 에베소서 4:11~16 데살로니가전서 5:12~13, 디모데전서 1:3~4, 4:13, 5:22, 디도서 1:1~3, 베드로전서 5:1~4.
“개인의 판단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자들은 매우 위태롭다. 사단은 이런 자들을 하나님의 사업을 건설하고 확장하는 자들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고의적으로 활동한다. 진리를 향상시키는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돕고 격려하고 힘을 주시기 위하여 제정하신 방법을 거절하는 것이다.”(복음교역자, 444)
“하나님께서는 전체적인 조직체를 통제하거나 사업의 어떤 분야를 통제하기 위하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안에 왕 같은 권력을 세우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지도자의 책임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지워지도록 하지 않으셨다. 많은 유능한 사람들에게 책임들이 분담되어 있다.”(교회증언, 8권, 23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권력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권력은 어떤 때 좋은 것이며, 어떤 때 나쁜 것입니까?
2. 우리 교회에 모본이 될 만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어떤 면에서 존경받을 만합니까? 하지만 어떤 개인을 추앙할 때 따르는 위험은 무엇입니까?
3. 교회 안에서 지도력에 문제가 생겨 그 문제를 다루어야 할 때, 어떻게 하면 확고함과 자비의 정신을 함께 나타낼 수 있을까요?
4. 예수님 외에 성경의 인물 가운데 본받고 싶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과반에서 나누어 봅시다.
5. 이번 한 기 동안 공부한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십시오. 배운 내용 중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무엇이며, 내 삶에 일어난 한 가지 분명한 변화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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