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과 택하심을 입은 부녀에게 보낸 요한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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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과 택하심을 입은 부녀에게 보낸 요한의 편지
9월 19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34분)
도입)
스코틀랜드의 한 교회에 말썽꾸러기 소년이 있었다. 그는 고아였고 성격이 난폭했다. 어느 날 교회학교 교사가 불쌍한 소년에게 옷 한 벌을 선물했다. 그런데 며칠 후 소년은 이 옷을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교사는 그에게 다시 새 옷을 사 주었다. 이번에도 몇 번 입어보더니 휙 던져 버렸다. 사람들은 교회학교 교사에게 충고했다. "저 아이는 구제불능 입니다. 더 이상 사랑을 쏟을 필요가 없어요." 그러나 교사는 소년에게 세 번째로 좋은 옷을 선물하며 속삭였다. "네가 옷을 버리는 것은 용서한다. 그러나 교회출석은 계속한다고 약속해다오" 결국 이 말썽꾸러기 소년은 예수를 영접하고 새 사람이 되었는데 이 소년의 이름은 로버트 모리슨 목사이다. 중국 선교사로서 '영. 중국어사전'을 집필한 역사적 인물이다. 교육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특히 한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키려면 엄청난 희생과 인내를 감수해야만 한다.
기억절: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이 1:9)
연구범위: 출 20:1~17, 롬 6:17, 살후 2:10, 히 13:2, 요이 1장, 계 2:14~15, 14:12.
학습 포인트: 요한이서의 기본적인 메시지는 무엇이며, 요한이서는 요한일서와 어떤 면에서 비슷한가? 요한은 ‘사랑’의 개념을 ‘진리’의 개념과 어떻게 연결시켰는가? 계명들을 지키는 것과 사랑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요한은 왜 거짓 가르침의 문제를 그토록 심각하게 받아들였는가? 요한은 왜 교인들에게 거짓 교사들을 집에 들이지도 말라고 했는가?
안식일 오후
요한의 두 번째 서신은 여러 면에서 첫 번째 서신과 비슷하다. 같은 단어들이 사용되었고, 같은 주제가 등장하며, 신자들에 대한 동일한 관심사가 나타난다. 개인적인 관심이 두 서신에서 모두 발견된다.
그러나 두 번째 서신은 첫 번째 서신과는 대조적으로 서언과 결어의 형식을 갖춘 전형적인 편지의 형태로 쓰였다. 본론 부분에는 칭찬과, 사랑하며 계명에 따라 행하라는 권면과, 적그리스도들에 관한 경계의 말이 포함되어 있다. 요한이서와 요한삼서가 분량이 짧은 것은 아마도 파피루스(종이)의 크기에 맞추어 썼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도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용할 단어를 조심스럽게 선택했을 것이 분명하다.
일요일(9월 13일)
사랑과 진리 안에서
도입)
요한 이서의 이 짧은 서신은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띄웠는데, 이들은 아마도 특정한 교회와 그 교인들을 지칭하는 것 같다. 끝맺는 말에도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가 나오는데, 이들은 또 다른 교회와 그 교인들을 가리킨다(1:1, 13). 요한 일서처럼,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진리를 계속 추구할 것과 서로 사랑할 것을 권면하였다(4-6절). 또한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되지 말고 올바른 교리를 굳게 붙들라고 경고하였다(7-11 절). 요한 이서는 요한 일서와 마찬가지로 거짓교사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다. 저자는 서로 사랑하라는 개념을 강조하면서도 그러나 거짓교사에 대해서는 사랑도 관용도 베풀지 말 것을 촉구하고 있다. 즉 요한이서는 사랑과 관용의 한계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사랑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예수님의 계시와 삶을 통해 배운 것이다. 사랑은 신앙생활의 한 요소나 부분이 아니라 전부이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삶의 전부여야 한다. 먼저 요한은 교회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 요한은 1절에서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한다.'고 했다. 당시 '장로'라는 명칭은 사도와 목회자와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을 총칭하는 명칭이었다. 훗날 역사적으로 교회는 목사 장로인 목사와 치리 장로인 장로로 나누어 말씀과 치리의 일을 섬김의 정신으로 감당하도록 하였다. 어쨌든 요한은 교회를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편지를 썼다. 여기에서 편지를 받는 대상자가 부녀와 그의 자녀라고 했는데 당시 초대교회에서는 교회를 여자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성경은 교회를 신부로 표현하였고 성도들을 교회의 자녀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1. 요한이서를 읽으십시오. 요한일서와 유사한 점은 무엇입니까? 요한이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답:
요한이서를 대충 훑어보더라도 이 서신이 한 부녀에게 보내졌다기보다는 신자들의 무리에게 보내졌음을 알 수 있다.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교회를 여자로 묘사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엡 5:22~23, 계 12:16).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신자들은 문자 그대로 어린 자녀들이 아니고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다.
2. 요한이서 1:1~4을 읽으십시오.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는 무엇이며, 요한은 그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참조 살후 2:10)
답:
요한이서 1:1~4에서 ‘진리’라는 단어를 ‘사랑’이라는 단어와 결합하여 사용되고 있음을 주목해 보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는 참된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랑은 단지 정서적으로 혹은 감성적으로나 피상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며, 그 사랑은 ‘진리’라는 틀 안에서 표현된다.
우리가 진리에 대해 말할 때 하나님과 진리이신 예수님(요 14:6), 그리고 성령님을 떠올리게 된다. 성령께서 신자들과 영원히 함께 하시듯이(요 14:16) 진리도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한다(요일 1:2). 진리와 사랑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함께 그리스도인 믿음과 경험 가운데 머물도록 이끌어 준다.
동시에 진리와 사랑은 요한이서의 주요한 주제를 이룬다. 사랑은 5~6절에서 좀 더 깊이 논의된다. 진리는 기만과 그 결과를 분별하고(7~8절),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거하게 하는 데(9~10절) 필수적인 요소이다.
교훈: 요한이서에 자주 반복되는 두 단어는 진리와 사랑이다. 이 두 단어는 참된 그리스도인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며, 상호 보완적 작용을 한다.
부가적용)
은혜, 긍휼, 평강, 진리, 사랑, 이 말들은 고리처럼 연결된,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말들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진리와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또한 성도들은 진리와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긍휼을 체험하게 된다. 요한 2서는 245 단어로 된 짧은 편지 성경이다. 이렇게 짧은 성경에 진리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진리라는 말은 누구나 좋아한다. 특히 교육 기관에서는 이 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기가 나온 학교의 교훈을 생각해 보면 진리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학교가 많을 것이다. 우리 삼육대학의 이념도 진리가 들어있다. 진리라는 말을 학교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교회이다. 왜 그럴까? 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 성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곳인데 하나님이 바로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진리가 사랑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그 진리는 무가치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를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진리를 실천하며 행할 때 기뻐하신다. 사도요한이 말씀하는 진리는 바로 사랑이다.
월요일(9월 14일)
계명들을 좇아 행함(요이 1:4~6)
도입)
요한은 분명히 신학이 윤리를 특징짓고, 잘못된 신학은 잘못된 행동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른 신학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요한은 신앙생활의 매우 구체적인 지침을 말해 주었다. "빛 가운데 행하라." "죄를 범치 말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아무도 우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 "궁핍한 형제가 있으면 말로 아닌 행동으로 도와주라."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심령이 성화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질을 사람 속에 부식(扶植)하는 것이다. 복음의 신앙은 곧 그리스도께서 그 생애 가운데 사시는 것이니 곧 살아서 활동하는 원칙을 말한다. 이 신앙은 품성 가운데 그리스도의 덕성이 드러나고 그것이 선한 행실을 하게 하는 것이다. 복음의 원칙들은 우리 실생활의 어떤 부문으로부터도 분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경험과 활동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대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눅 10:25-37)
4절의 내용은 교회와 요한에게 용기를 주었다. 교인들은 “진리에 행하는 자를 보니 심히 기쁘다”는 장로의 말을 듣고 격려와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해서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고자 하는 동기를 갖게 되었다. 진리 안에 행하라는 계명은 요한일서 3:23에서도 발견되는데, 여기서 요한은 예수님을 믿고 서로를 사랑하라고 우리에게도 호소한다.
1. 사랑과 계명은 어떻게 서로 연결됩니까? 요한이서 1:5~6을 보십시오. 왜 이 말씀은 특히 우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에게 중요합니까?(참조 계 14:12)
답:
요한은 기쁨을 표현한 다음(4절), 요청과 권면의 말씀을 덧붙인다(5~6절). 요한은 다시 계명에 대해 이야기한다(5절). 그런데 그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요한은 계명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로 옮겨가는데 참으로 그 계명 자체가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6절에서 그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계명들(복수)이라는 말과 연결시킨다.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는 계명이 있는데 이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며, 이 사랑은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나타난다.
2. 계명들을 지키는 것(출 20:1~17)이 어떻게 상호간의 사랑을 나타내 줍니까?
답:
흥미롭게도 율법과 규례, 혹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지켜나가는 것이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것은 이치에 정확히 맞다. 사랑은 단지 우리가 느끼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것이요,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 하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참된 사랑은 단순히 십계명에 순종하느냐하는 것의 차원을 뛰어 넘는다. 참된 사랑은 율법에서 발견되는 원칙들과 분리될 수 없다.
교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나타나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부가적용)
교회에서 말하는 사랑은 진리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말을 들라고 하면 사랑이다. 이 사랑이라는 말이 형식적인 말, 알맹이 없는 말, 공허한 말이 될 때 교회는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사랑이라는 말이 실제적인 말, 살아있는 말, 힘이 있는 말이 될 때 교회는 생동감이 넘치게 된다.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모든 교회 교회가 다 좋은 교회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더 좋은 교회이다. 교회의 사랑은 진리를 중심으로 한 사랑을 실천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진리를 기초로 하고 있다. 진리를 동반하지 않은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사랑하라”는 진리에 근거해서 사랑을 실천하려고 힘쓴다. 가장 위대한 사랑의 찬가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3:6절에서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랑과 진리가 만나면 기쁨이 있다. 사랑이라는 말은 여러 형태로 쓰이는데 군대에서는 전우애를 강조하고, 직장에서는 동료애를 강조하며 정당에서는 동지애를 강조해 말한다. 그렇다면 교회의 사랑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진리애(眞理愛)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우리의 진리의 애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화요일(9월 15일)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나침(요이 1:7~9)
도입)
요한은 복음의 빛과 계시로부터 이탈함에 대한 위험과 죄에 대하여 말한다. 그것은 결과적으로나 실제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떠나게 되는 것이 된다. “지나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교훈이 우리를 인도한다. 이로써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시며 그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가 된다. 기독교의 진리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진리의 대상과 주체가 되시는) 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에게 매어 놓는다. 이는 그리스도와 아버지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는 자(뿌리를 박고 근거를 둔 자)는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소유한 자이다.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지식에 눈을 뜨게 된다.
1. 요한이서 1:7~9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요한은 무엇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까? 그가 경고하는 것처럼 기만에 빠질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될 수 있습니까?
답:
요한이서 1:7~9에서 요한은 거짓 교사들과 예수님에 대한 그릇된 가르침의 문제를 다시 언급한다. 이것은 이미 요한일서에서 제기되었던 것과 같은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 그들 자신이 ‘미혹하는 자’가 된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물론 진리 안에서 행하는 이들도 있었으나(4절), 목자는 하나님과 그분의 교회를 떠나간 이들로 인해 애통해 하고 있다.
예수님에 대한 적그리스도들의 견해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크게 달랐다. 교인들은 그들과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물들지 않기 위해 경계해야만 하였다. 여기서 요한은 신자들도 길을 잃을 수 있으며,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개념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2. 요한이서 1:9을 읽으십시오. 그는 바른 '교리'의 중요성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참조 마 16:12, 행 2:42, 롬 6:17, 계 2:14~15)
답:
요한은 교리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착각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거짓 가르침이 한 사람의 영생을 잃게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리는 중요한 것이다!
이 구절에는 도전 받고 있는 예수님에 관한 사도의 가르침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이 성경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 신실하게 머무른 자들 속에는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가 있다. 여기에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등한 분으로 제시되어 있다. 예수님에 관한 가르침을 거절하는 것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과 같다.
교훈: 그리스도에 관한 바른 견해를 거절하는 것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게 하고 마침내는 영생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바른 교리는 중요한 것이다.
부가적용)
일반적으로 사람의 전인적인 삶에 중요한 것은 바른 가치관과 바른 사상이다. 사람이 아무리 머리가 좋고 실력이 있어도, 그 사람의 가치관과 사상이 그릇되면, 그 사람의 모든 인생이 잘못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에 있어 실로 중요한 것은 성경에 대한 바른 교리 이다. 교리를 말하면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교회 나가 열심히 봉사하고 예배드리고 살면 되는 것이지 무슨 딱딱한 교리를 말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교리 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교리란 성경교리를 뜻하는 것으로, 변할 수 없는 성경의 진리 그 자체를 뜻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단 중에 가장 위험한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음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미혹하자는 자의 거짓된 가르침은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7절)이다. 이들은 주 예수에 대한 그릇된 생각과 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 신앙적인 노력이 헛되이 돌아가는 일은 참으로 유감된 일이다. 어떤 자들은 시작은 훌륭하나 드디어 그들의 모든 수고가 헛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젊어서부터 계명을 지킨 소망 있는 사람이 세상에 대한 사랑의 억제와 그리스도에 대한 보다 큰 사랑의 결핍으로 모두를 상실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은 이미 얻은 바를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수요일(9월 16일)
환대하지 말라?(요이 1:10~11)
도입)
요한 2서는 6절까지 사랑을 이야기 하고 진리를 이야기하다 7절에 와서는 분위기가 바뀐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다’, ‘적그리스도’, ‘인사도 하지 말라’, 이런 험한 말이 나온다. 초대교회 시대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주장을 가현설(假現設)이라고 한다. “가짜로 나타났다‘는 뜻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을 영지주의자라고 불렀다. 요한은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을 ’미혹하는 자‘라고 불렀다. ‘속이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적그리스도’라고도 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는 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진리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말과 짝을 이룬다. 진리와 사랑, 이 말은 ‘진리는 사랑해야 한다’ 라는 뜻도 된다. 진리의 반대는 거짓, 비진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비진리라는 말은 무엇과 짝을 이뤄야 할까? 배격이라는 말과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단호한 배격’, 즉 진리가 아닌 것들은 단호하게 배격해야 한다. 사도들은 진리가 아닌 것에 애매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그래서 교회를 위기로부터 벙하고 지킬 수 있었다. 진지를 가지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은 집에 들이지도 말라고 했다.
1. 성경은 남을 대접하는 것을 매우 가치 있는 일로 여깁니다(히 13:2, 벧전 4:9). 예수께서는 세리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바르지 못한 신학이나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과도 어울리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초대받은 사실과 요한이서 1:10~11에서 말하는 내용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습니까?(참조 마 10:14~15, 18:15~17)
답:
물론 환대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좋은 덕목이긴 하지만, 만약 그 환대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거짓 교리를 돕는 것이라면 마땅히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주후 1세기에 교사들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가르쳤고 숙식을 제공하는 교인들의 집에 함께 머물렀다.
만약 이러한 교사들이 거짓 교리를 퍼뜨릴 경우에, 그들을 환대하는 것은 그들의 입장을 옹호하고 그들의 사역을 돕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특히 사도들의 가르침과 거짓된 견해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는 교인들은 지도적 위치에 있는 교인이 거짓 교사를 자기 집에 들이는 것을 보면서 혼동하거나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었다.
요한은 이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그들과 어떤 접촉도 하지 말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행동이 진리와 반대되는 견해에 동의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매우 조심해야 한다.
10절과 11절은 개인의 행동이라기보다는 전체 교회의 태도에 관한 것이며, 10절에 나오는 “집”은 개인의 집이 아니라 교인들이 만나 예배드리는 곳을 지칭한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교회는 이설을 가르치는 자들을 독려해서는 안 된다.
간단히 말해서, 거짓 교사를 환대하는 것은 그가 제시하는 가르침을 지지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설의 심각성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성경에는 이 주제가 자주 언급되고 있지만, 오늘날에는 이단 이설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도 비판적이고 거만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진다. 요한은 우리에게 진리와 오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교훈: 환대를 베푸는 일은 물론 좋은 일이지만 거짓 교사들을 환대하는 것은 그들의 그릇된 가르침을 옹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다.
부가적용)
오늘날 교회는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 애매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교회를 약하게 하고 교회를 흔들게 된다. 성도들이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인 것으로 알고 혼돈을 일으키고 받아들이게 할 위험이 있다.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 거짓 교훈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배격하지 않으면, 수고한 것의 열매를 잃어버리게 된다. 상을 받지 못하게 된다.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 이단에 대해, 그리스도의 교훈이 아닌 것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예수님은 요한 17:17절에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했다.
목요일(9월 17일)
서로 교통함(요이 1:12~13)
도입)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중에 생명이 있는 생명체의 공통된 특징은 ‘교통과 사귐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했지만,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과 식물들까지 나름대로의 '교통과 사귐이 있다. 여기서 ‘사귐’이란 각각의 개체간의 ‘교제’ ‘교통’을 의미한다. 말을 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식물들도 자기 나름대로의 교제를 통하여 번식을 한다. 꽃을 피우고, 꿀을 만들고, 냄새를 풍기는 것은 나름대로의 의사소통이며 교제의 수단이다. 미물인 개미의 사회에도 엄격한 규율과 철저한 사명의식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냄새와 몸의 동작, 소리로 의사를 표현하며 서로 교통한다. 만물의 영장으로 특권을 부여받은 인간에게 있어서의 ‘사귐’은 모든 생명체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여러 통로로 표현하며, 서로를 나누는 사귐을 통하여 사회를 만들어 간다. 그러나 다른 생명체들과 전혀 다른 특별한 교제가 있다. 그것은 다른 어떤 생명에게도 주어져 있지 않은 ‘영적의 교제’이다. 육적인 교제는 모든 생명체의 공통적인 것이지만, 영적인 교제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것이다. 이 영적인 교제가 없다면 인간의 특별성은 부각될 것이 없을 것이다. 세상 과학이 주장하는 대로 단지 조금 더 진보된 생명체 일 뿐일 것이다.
12절과 13절은 요한이서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한다. 이 구절들은 이 서신의 결론으로, 독자들에 대한 요한의 개인적인 관심사가 무엇이며, 그가 얼마나 간절히 신자들을 직접 만나기 원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1. 요한이서 1:12~13에서 요한의 의지를 살펴보십시오. 서신을 통한 간접적인 만남에 비해 직접 대면하여 만나는 것의 유익한 점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리라"는 표현에서 그가 왜 그들을 만나기 원하는지에 대한 어떤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참조 행 2:42~47)
답:
요한이 전달한 기별은 매우 강한 것이었다. 특히 요한이 적그리스도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전혀 타협이나 양보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바울이 갈라디아에 보낸 편지에서도 이와 같은 태도를 엿볼 수 있다.(갈 1:6~9)
요한은 자신의 기별을 구두로 전할 수도 있었으나, 기록된 형태로 전함으로써 좋은 점도 있었다.
1. 사도들에 의해 쓰여진 편지는 특별히 중요하고 권위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신중하게 받아들여졌다.
2. 편지는 방문하는 것보다 독자들에게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상황이 중대할수록 신속한 반응이 요구되었다.
3. 기별은 다른 교회들이나 같은 상황에 처할 후세대를 위해 보존되었다. 실제로 요한은 자신의 편지를 다른 교회들과 나누라고 하였다.
4. 편지는 매우 주의 깊게 구성되기 때문에 말로 진술하는 것보다 더 정확할 수 있다.
5. 성령께서 글 쓰는 이로 하여금 바르게 기록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신다.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여전히 그들과 직접 대면하여 만나기를 원하였다.
교훈: 요한은 편지로 성도들과 교통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직접 대면하여 만나기를 바랐다. 성도의 교제는 이 땅에서 천국을 미리 맛보는 것과 같다.
부가적용)
1773년 영국 ‘웨인게스트'(Wainsgate) 라는 시골 소도시에서 저술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어렵게 목회하던 ‘존 퍼셋(John Fawcett)이라는 목사가 있었다. 그 목사는 런던의 큰 교회의 초청을 받아 44년을 넘게 목회하던 시골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이사를 도우러 온 마차에 얼마간의 이삿짐을 실은 다음 목사관을 막 떠나려고 하던 때였다. 마중 나온 성도들이 더 좋은 여건의 목회지로 떠나는 목사님 내외를 차마 붙잡지는 못하고 눈물만 훔치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모님 ‘메리 퍼셋’(Marry Fawcett)이 갑자기 땅에 주저앉으면서 남편에게 ‘여보 난 여기 못 떠나요, 이 형제자매들을 다 두고 난 떠날 수 없어요’ 하고 통곡하였다. 그러자 삽시간에 교회 마당은 눈물마당이 되었다. 잠시 후 퍼셋 목사는 ‘여보, 짐을 다시 들여 놓읍시다.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 있는 곳, 이보다 더 좋은 교회가 어디 있겠소.’하며 이삿짐을 다시 목사관으로 들여 놓았다. 그리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그가 지은 시가 찬송가 535장이다.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 피차에 슬픔과 수고를 나누고 늘 동고동락하는 중 위로를 나누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인 우리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기쁨과 즐거움,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신다. 매일의 삶에서 이 기쁨과 행복의 아름다운 사귐이 가득하도록 성령 안에서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기도와 사랑으로 성도들 서로를 생각하며 살아가기를 축원한다.
금요일(9월 1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갈라디아서 2:11~16, 디모데전서 4:17, 디모데후서 2:14~19, 요한계시록 2:13, 12~16, 18~25.
“사도 요한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공손함을 나타내는 한편, 죄와 죄인을 그대로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에 일치하는 행동이라고 그는 가르쳐 준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돌아가시고 구원하고자 애쓰신 영혼들을 우리가 사랑하되 그 죄와는 타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역하는 자들과 연합하지 말아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요한이 그 시대에 그랬듯이 오늘날의 하나님의 백성도 영혼을 파멸시키는 오류에 대항하여 의를 위해 굳게 설 것을 요구하신다.”(성화된 생애, 65)
“세상의 가장 큰 결핍은 인물의 부족이다. 그 인물이란 매매되지 않는 사람, 심령이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 죄를 그대로 죄라고 부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마치 나침반의 바늘이 틀림없이 남북을 가리키듯이 양심이 그 의무에 충실한 사람, 비록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옳은 일을 위하여 굳게 서는 그런 사람들이다.”(교육, 5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교리나 가르침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우리가 얼마나 친절하고 포용적이냐가 중요하다고 하는 견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2. “진리란 무엇입니까?” 교과반에서 각자의 견해를 묶어서 하나의 완전한 정의를 완성해 보십시오.
3. 방황하고 있는 교인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정죄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해 줄 수는 없을까요?
4. 우리 교회는 대체로 얼마나 접대를 잘 합니까? 우리 교회가 이 분야에서 더 잘 할 수 있도록 나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5.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인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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