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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마운 여성, 결코 잊지 못할 여성들이 세상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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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영근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10.04.06 05:00 조회수 5,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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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이 크게 교통사고를 당하시자 집에서 식비가 올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모두가 몹씨 가난하게 살던 시절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밤과 낮으로 노동을 해도 식비를 위한 식권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등록 때 미납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살 때도 이웃집 식사시간이 되면 기어이 집으로 돌아오곤 하는 성미여서 누구에게 굶

고 지낸다는 말을 하지 아니하고 일주간을 전혀 먹지 않고 살아보니 도저히 배가 곺아 살 수

가 없었습니다.

소위 신앙의 힘으로 버티면서 공부며 밤낮 노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체력인지라 한계점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다 곤란하게 지내는 판에 급우생에게 식권을 빌릴 수도 없고 서울과 거리가 먼 거리

인지라 달리 구걸할 길도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학교에 가서 회계를 만나고 다시 총무를 만났는데 부채를 일단 정리하기 전에는

식권을 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두 말 할 것 없이 "아, 죄송했습니다." 라고 절하고는 그 길

로 나왔습니다.

밖을 나오니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는것이었습니다. 나는 역역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님, 이게 내 눈물입니까! 늦은비 성령이심니까!"라고.

총무가 하는 말은 내가 먼저 그렇게 말하고싶은 맞는 말이었습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 왔으면

집에서 학자금을 가져와야 하는 것이니깐요.  모처럼 뭉뚱거렸던 용기가 꺾이고 나니 2째 주

일을 지낼 땐 정말 더 배곺으고 낙심되고 어찌해야 하나싶어 난감했습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년을 쉬었다가 공부하러 올라온 나였지만 아무래도 눈물을 머금

고라도 이젠 낙향해야 하겠다는 결론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나도 모르게 일터에 있어야 할 내가 이유없이 식당에 와 있었습니다. 참 이상했습니다.

이때 식당에서 음식을 만들고 배식까지 돕는 친절한 충청도 아주머니를 우연하게 만났지요.

큰 누나 같은 아주머니가 나를 보더니 "아니, 요사이 왜 보이지 않았죠. 얼굴이 몹시 안좋은데

요. 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라고 관심과 염려 섞인 부드러운 말투로 내게 물었습니다. 나는 이

때 깜짝 놀랄만치 가슴 뿌듯했습니다.  학생들도 많은데 나같은 사람이 보이는지 아니 보이는

지를 기억하고 있는 아주머니가 있었구나! 싶은 생각에서 였습니다. 아주머니, 감사해요! 라

고 응수했습니다.

그녀는 내게 가까이 오시더니 다시 다굳혀 물었습니다. "왜 얼굴이 그래요? 왜.....?"

그의 관심에 정감이 갔던지 "요사이 식사를 여러 끼 하지 아니했더니 그렇소." 라고 토로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까지 나 생명까지 위험한  바람에..."라고 말해버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주머니는 즉시 나를 위한 식단을 공짜로 짜주셨습니다.

아침 몇시, 저녁 몇시였습니다. 누룽지를 끌여서 구수하게 만들어 나를 공궤하듯이 잘 먹게 해

주었습니다. 아주머니가 말하기를 밥은 줄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식당에도 준수사항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상당 량의 우유가루를 주면서 아침 마다 방 앞에 있는 연탄불에서 잘 끓

여서들라고 양은 그릇까지 주시기도 했습니다.

때론 그것을 확인 말도 하고 일부러 기숙사까지 와보기도 했습니다. 저는 어쩌면 부끄러운 이

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 일이 졸지에 저에겐 보통 의지가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신학을

이 아주머니에게서 학습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랬습니다. "허허허, 아주머니가 나의 선생닙

이십니다!" 그랬습니다. 아주머니는 "그 말이 무슨 말이죠?" 하기도 했었지요.

 

 

대하면 대할수록 정신이 참 훌륭하신 분이었습니다. 학생들이 개인적으로 무슨 음식을 좋아

하는지 까지를 기억하고 있다가 학생은 이 음식을 좋아하지 하고 그 음식을 밀어주는 때는 나

는 참 남다른 분이시구나 하고 고개가 숙여지는 생각이 많이 들었었습니다.

어떤 때는 누룽지 아닌 하얀 밥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나는 극구 사양을 했습니다.

하시는 말씀이 나도 학생처럼 누룽지가 좋아져서 내 밥을 바꾸어 준 거예요. 부담 갖지 마세

요. 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밥그릇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주님, 이것이 엘리야를 먹이신 가마귀 이적이십니까. 그렇

다면 제게도 엘리야의 기별이 있겠군요!" 했었습니다. 아주머니 누나를 보람되게 하기 위해서

라도 내가 정진해야 한다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아주머니는 내 생각을 다 읽지 못

했겠지요. "아니 국 식는데 어서 들어요." 하십니다.

 

 

결과적으로 아버지께서 살아나신 것만 해도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염치없이

수개월을 이렇게 지낸 거 내게는 기적 같은 은혜였습니다. 저는 은혜 아니면 살 수 없었습니다.

무엇 보다 은혜 아니면 학업의 그 길을 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일찍부터 식사시간에 음식타박

을 하지 않으려 생각해 왔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이것도 감사하니깐요. 고량진미이지요.

나는 말이 적은 사람이지만 마음으론 무척이나 그 아주머니가 감사했고 더 없는 은인이었습

니다. 때론 누룽지 뭉치를 만들어 주시면서 야경할 때 다니면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영낙없는 내 친 누나나 다름없는 누나, 나는 이분의 온정을 우리나라 사람의 온정과 정감으로

지금 동일시 하면서 우리나라를 가슴에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분을 만나본 후로는 충청도 사람들은 다 좋은 사람들로 보이고 있습니다. 나는 충청도에서

사역을 했던 때가 있었는데 충청도가 그렇게 좋아진 원인이 우선 아주머니의 사려깊고 이해성

많은 따뜻한 마음, 그리고 한 사람에게  쏟는 그의 관심도 정신의 훌륭함 때문이었을 것이라 생

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낙향하고 말았을런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아마 다른 길이 없으니

깐 필시 그랬을 것입니다. 참 고마운 은인 아주머니, 누구에게나 그러신 누나, 지금쯤 무엇하고

어디 사시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복을 많이 받고 사세요. 그리고 하늘에서 만나뵈요.

이래서 도르가가 죽었을 때 "모든 과부가 울고...저희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행 9:39)였구나 하는 피부감에 와 닿는 생각을 하게 되어집니다.

오늘날 이러한 사려깊은 숨은 여성, 숨은 누나들이 곳곳에 계시지요! 여성선교회는 훌륭합니다.

와, 재림교회는 여성인재 부자구나! 싶습니다. 이들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을 많이 받

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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