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겨자나무에 새들이 날아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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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나무에 새들이 날아들다 / 박봉진
뜻밖이었다. ‘겨자나무’라 해서 뽕나무나 올리브나무 같은 나무인줄 알았다. 그것은 나무가 아니었다. 봄날, 사막토질인 LA인근 산야에 흐드러지게 피는 꽃, ‘갓꽃’을 닮은 한해살이 야생초였다.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봤던 내 식견이라니. 심은 씨앗이 파래지자 어렴풋이 감이 잡혔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몇 해 전, 성지투어 중 일행이 갈릴리와 예루살렘에 갔던 땐 5월 초순. 꽃이 진 장다리형태 겨자나무를 그렇게 만났다. 다른 나라 안내는 현지 가이드가 했다. 허나 이스라엘에선 그곳 대학연구원 한국교수가 맡았다. 곳곳 해설은 화끈했으나 비유말씀에선 현물 확인만으로 끝냈다.
흡사 애벌레 모양으로 보였던 겨자나무 씨방 몇 개를 땄다. 고려말기 중신 문익점이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 반출 금지품목 목화씨를 붓대궁 안에 넣어왔듯이 나도 그리해봤다. 목화씨는 체리 씨만 해도, 겨자씨는 열무 무씨만 해 주머니 안 먼지처럼 입국 때 문제꺼리도 아니 됐었다.
뒤뜰엔 과목과 작은 채소밭이며 꽃밭도 있는데 거기엔 적합할 것 같지 않아 겨자씨를 서랍에 넣어뒀다. 유기농 수확물과 꽃들을 보는 재미가 제법이기로 겨자씨를 잊고 지냈다. 건데 새들을 모아보려 모이를 뿌리고 새집을 달아줘도 새는 오지 않아 뒤뜰은 여전 미완성으로 남았었다.
메뉴엘 에는 밭에 겨자씨 한 알을 심는 거다. 겨자는 밭작물에선 메어내야 할 야생 가라지가 아닌가. 밭에 심을 작물이 못돼도 우리네 개인처럼 은혜 입은 수혜자일 수밖에 없다. 거름을 깔고 물을 줬다. 연한 잎이 한 뼘이나 커서 나물이 되더니만 속대가 뻣뻣해져 가슴께로 자랐다.
장다리가 다돼서 뻗친 가지마다 노란 꽃을 피웠다. 야생이 밭작물을 압도하더니 약점도 보였다. 꽃대가 흔들바람에선 취약해 지주목을 세워 매어줬다. 꽃이 씨방이 돼 누르스름 익어갔다. 겨자나무는 별개가 아니다. 성장과정 따라 지금껏 새싹, 나물, 나무로도 말하는 관습뿐인걸-.
참새는 어느 나라에도 다 살고 있다더니 못 봤던 새들이 때맞춰 겨자나무에 날아든다. 그 표현은 알기 쉬웠어도 대미는 형상화요, 한 점 오차도 없는 오묘다. 이제 우리 집 뒤뜰도 완성되어가려나.♥
(미주 '교회지남' 권두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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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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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寧熙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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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친히 비유로 말씀하신
팔레스틴 지방에서 작은 겨자씨를 직접 가져
오셔서,
뒤뜰에 생생한 실물교훈을 재현해 주셔서 감동이 되살아 납니다
저도 채소밭에 겨자( mustard/ 와사비) 를 해마다 재배를 하고 있지만
다른 작물을 압도해 밭 가에 몇그루 세워놓습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의 농부들은 밀 보리를 주로 파종했기 때문에
그들이 뿌린 씨앗 중엔 겨자씨가 상대적으로 작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지금은 채소 중에 겨자씨보다 더 작은 씨들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겨자씨처럼 작음에도 나무처럼 가지를 뻗고
새들이 깃드는 채소는 없지요
비록 겨자씨 만한 작은 믿음이 있어도 산을 옮길 만한
큰 믿음의 나무로 키워 주시는 분의 말씀은
당시 농부들에겐 적절한 실물교훈이었겠지요
씨를 잘 보관하셨다가 널리 분배해 주십시요
보통 씨가 아니잖아요
"팔레스틴 산 토종 겨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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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진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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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장로님, 금년 같은 힘든 여름나기에도 여전 잘 지내고 계시네요?
'신로신불로'라더니 장로님 말씀엔 한참 때의 그 열정이 말씀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어 반가워요.
받으신 다른 축복들도 많으시지만 장로님의 심신 최고조 그보다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싶습니다.
말씀 소재를 택해 읽기 편한 수필작품적으로 창작해낸다는 것은 제게 큰 부담이였습니다.
그래 저는 말씀 소재는 피하고 바깥 변부리만 에돌았는데, 장로님처럼 핵심을 짚은 열정 어조로 말씀하시니 더 감명적입니다.
고맙고 황송합니다. 쉼 없이 일진월보하시는 장로님의 기력, 오래 오래 보전하시고 누리시길 간구드립니다.